《산-한량》
곽인탄, 김도연 2인전
디자인 : 김도연
촬영 : 신유진
2023. 10. 28 (토) - 11. 19 (일)
13:00 - 20:00
매주 월 휴무
챔버1965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로 26-6)
《산-한량》은 저 너머의 풍경을 바라본다. 전시 공간의 벽은 산 풍경으로 변모되며 그 공간을 또 다른 낯선 풍경이 가로지른다. 두 작가가 제작한 평면 작품은 실내와 야외 풍경의 교차를 시도한다.
곽인탄은 과거의 잔여물을 재구성하여 현재의 조각을 제작하는데 집중한다. 미술사에 서술된 회화, 조각들을 자유자재로 해체하고 본인의 방식으로 독특한 조형을 시도한다. 또한, 곽인탄의 조각은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내적인 여러 문제와 불만을 해소하고 극복하기 위한 유희의 장이 된다.
이번 전시 <산-한량>에 출품한 작품은 조각과 평면 작업이 서로 교차되어 역전된 상태로 구성된다. 조각 작품들은 패널 위에서 드리핑 방식으로 채색되는데, 이 과정에서 흔적이 남겨진 패널은 전시 공간을 새롭게 분할한다. 그동안 주체로서 설치됐던 조각 작품들은 이번 전시에서 본인의 평면 작업으로 재구성한 공간 내부에 한량과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둔 상태로 은밀하게 놓여진다. 여기서, 한량 조각은 내부에 놓인 채 관객들을 마주하고 서로를 유심히 관찰한다.
김도연은 경험을 나누는 이야기를 작업의 주요한 요소로 삼고, 이를 전달하는 방식과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공유되고 해석하여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의 힘에 주목한다. 개인의 서사부터 넓게는 주변의 크고 작은 모든 생명과의 대화로 상생에 대해 환기해보며 비가시적인 요소를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동물과 인간이 자주 등장했던 기존 작품과 달리 <산-한량>에서 김도연의 신작에는 오로지 산 풍경만이 펼쳐져있다. 화면에서 이야기의 상황과 정서를 이끌어갔던 화자는 화면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전시공간을 마치 산속을 거닐 듯 탐색했던 작가의 관점을 보여준다. 구체적인 형상으로 대변되었던 감각의 정신적ㆍ생리적 상태는 회화적 표현 방식인 빠르고 느린 선의 속도와 면과 색채로 천착한다. 화자는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작가에 의하여 창조된 허구적 인물일 수도 있다. 다만 그림에서 화자와 작가의 관계는 밀접하기에 화자가 작가의 분신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주어진 공간을 바라본 작가(화자)의 시선을 관람자와 보다 가깝게 다가가고자 했던 이번 전시는 서사 구조의 배경 혹은 무대에 대한 접근을 새롭게 연출한다.
산(무지개 동산), 천에 유화, 150x150cm, 2023
산(암벽), 천에 유화, 150.3x54.3cm, 2023
산(화산), 천에 유화, 150.3x54.3cm, 2023
산(알라딘), 천에 유화, 100x100cm, 2023
산(라이온킹), 천에 유화, 100x100cm, 2023
산(뮬란), 천에 유화, 100x100cm, 2023
산(포카혼타스), 천에 유화, 100x100cm, 2023
국화가 필 때
박서영(독립 큐레이터)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나면 서지(西池)에 연꽃 놀이 삼아 한 차례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번 모이고, 연말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피면 한 번 모인다.[1]
‘한량’에 대한 정의는 시대마다 그 의미를 조금씩 달리하지만, 대체로 전직(前職) 없이 놀고먹는 사람을 일컫는다. 요즘에는 직업의 유무와 상관없이 돈을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한량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를 미루어 보아 한량이 딱히 부정적인 의미로만 통용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한량의 정수를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있을까?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재력이 뒷받침되는 것 같지만, 세속적인 욕망을 인지하고, 그것을 초월하여 세상만사를 관망하는 시선이 그 본질인 것 같다. 다시 말해 한량은 속세에서 배태되어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속내를 잘 알고 있지만, 경멸인지 지루함 때문인지, 모종의 이유로 그러한 세상과 거리를 두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가 읊는 세상은 낭만적이다. 그는 겪었던 세상을, 정수리보다 높은 곳에서 상상한 세상을 ‘그린다’.
이처럼 한량은 세상을 감상의 대상으로 두곤 한다. 그러나 그런 감상이 그저 세상을 음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직조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상을 인지하고, 비판하고, 이상을 꿈꾸는 일은 그것의 외곽을 또렷이 하고 외곽 너머의 탈출구를 마련하기도 한다.
곽인탄, 김도연 작가가 전시 《산-한량》에서 이 고리타분한 인물의 유형을 전시장으로 소환한 까닭을 여기서 찾는다. 두 작가는 세상의 ‘상’을 그린다.[2] 곽인탄 작가는 미술사 안에서의 시각적 레퍼런스를 취사선택하는 방식으로 조각을 제작해 왔으며, 김도연 작가는 환상적인 외양의 인물을 등장시켜 의미를 지연하는 그림을 그려 왔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이미지의 타임라인을 뒤섞어 시공을 재/창조하거나(곽인탄) 명명되지 않은 것들에게 이름을 붙이게 함으로써(김도연)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경험’과 ‘관조’를 오가며 상의 피륙을 짜내는 두 작가들을 어렵지 않게 한량에 빗대 볼 수 있다. 또한 상을 통해서만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말해 실재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기보다, 유희적인 태도로 그들만의 세상을 꾸리고자 하는 의지 역시 한량이라는 명패를 거머쥐기에 손색이 없다. 이와 같이 본 전시에서 ‘한량’은 두 작가(혹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은유하면서도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그런 와중 ‘산’이라는, 한량과 연계된 또 다른 부제를 통해 작가들은 자신이 주물러 세운 세상으로의 이입과 멀어지기를 거듭하는 중 간과했던 것,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의 작업을 지지했던 것에 대해 운을 떼기도 한다.
산속 한량을 지켜보기 - ‘평면’이라는 산
전시 《산-한량》에서 곽인탄 작가는 ‘한량’을 전시장에 꺼내놓는다. 철골 구조에 형형색색의 레진이 붙어 양감을 갖게 된 한량은 조각상이 되어 전시장 공간을 점유한다.(<한량 1>(2023), <한량 2>(2023)) 때로는 수성 페인트가 뿌려진 3D 프린터의 결과물이 한량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한량 1>(2023)) 이때 작가는 그 조각들을 온전히 내보이기보다 <평면 스터디>라 불리는, 일종의 ‘벽’과 같이 역할하는 시리즈물의 작품 뒤에 은밀하게 숨긴다. 하여 <한량 1>, <한량 2>는 <평면 스터디>가 미처 가리지 못한 틈으로만 감상이 가능하다.
곽인탄 작가의 작품은 미술사의 여러 사조를 참조하기에 조각과 회화 모두를 아우른다. 즉 그는 조각, 회화할 것 없이 저명한 미술 작품의 데이터들을 줄곧 ‘조각’이라는 매체로 소화해 왔다. 직립하는 조각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부유하던 이미지에 무게감을 부여하고, 역사를 토대로 하면서도 작가의 자기 참조적인 상사(相似)의 조형을 실험하는 장이 된다. <한량>은 작가를 둘러싼 수많은 이미지의 수렴과 변형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연장선에 있다. 한데 <평면 스터디>는 판판한 모양새로, 확실한 부피를 갖고 꼿꼿이 선 채 사방에서 관객을 맞았던 그의 기존 작품과 구별되며, 되려 <한량>을 그 뒤편으로 숨기는 등 작품의 감상을 해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평면과 <한량>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평면 스터디> 역시 그의 작업 논리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전시장에 놓인 그의 작품 전체가 그간의 작업 방식을 요약하는 하나의 거대한 설치 작품과도 같다고 이해해 볼 수 있다는 것인데, <평면 스터디>와 <한량>의 주고받음이 역사를 참고하는 작가의 사정과 그의 작품이 현재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평면 스터디>는 본래 <한량>을 칠할 때 그 아래 깔아 두었던 나무 판넬이다. 작가는 수성 페인트를 떨어뜨리거나 뿌리는 기법으로 조각을 채색하는데, 이때 판넬을 깔아 조각과 바닥을 보호한다. 그 판넬을 일으켜 세운 것이 해당 작품이다. 따라서 <한량>과 <평면 스터디>는 같은 색깔과 페인트를 흩뿌리는 작가의 움직임을 공유한다. 전시장 외부에 걸린 <평면 스터디 15>(2023), <평면 스터디 19>(2023)도 작품을 제작하며 나온 레진 찌꺼기 같은 조각의 부산물을 머금었다는 점에서 전시장 내부의 <평면 스터디 11>(2023), <평면 스터디 12>(2023)와 궤를 같이한다. <한량>으로부터 기인하여 그것의 제작 과정과 재료를 속속들이 내비치는 것이 바로 <평면 스터디>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시장의 공간을 분할하는 것이 <평면 스터디>의 가장 큰 역할인 듯하다. <평면 스터디>는 전시장 벽의 연장선과 같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구획을 하는데, 여기서 <한량>의 일면만을 보도록 시점을 제한하는 한편, 그 뒤에 숨은 <한량>을 위해 틈을 내기도 한다. 이런 <평면 스터디> 이중성과 그 사이를 비집고 드러나는 <한량>의 모습은 도판으로 갈음하는 역사, 그 한계와 이를 현재에서 재편하고자 하는 작가 특유의 방식을 갈무리한다. <평면 스터디>는 <한량>을 관찰하는 시점에 제약을 가해 마치 사진처럼, 스크린 속 디지털 이미지처럼 어느 한쪽에서만 <한량>을 마주할 수 있게 한다. 이는 <한량>으로 응축된, 작가가 품고 있던 여러 역사적 레퍼런스들의 단편적이며 비-경험적인 특성을 암시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평면 스터디>는 캔버스에 칼집을 내 실제 공간을 만들어낸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작품처럼 도려내지는 희생을 감내하며 공간을 창출해 내기도 하는데, 이로써 <한량>이 서 있을 수 있는 터가 마련되고 그것의 입체감이 방증된다. 조각에 작가만의 표현주의적 터치를 가하는 중에 파생된 물질이 조각의 자리를 만들고 실재감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이미지를 곡해하는 작가의 행위가 조각이 ‘지금 여기 있음’을 증명하는 조건이 된다는 점을 환기한다. 유명 이미지의 해체와 재조합, 그곳에의 사적인 감각의 투사가 조각의 이미지를 역사적 레퍼런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그것이 렌즈와 스크린을 거의 절대적으로 전제하는 오늘날 이미지의 관성에 함몰되지 않도록 방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역사의 입체적 형세를, 그런 역사와 개인의 다각적 개연성을 가늠하게 된다.
독립적이면서도 부연(敷衍)적인 <평면 스터디>와 <한량>은 이렇게 서로를 지탱한다. <평면 스터디>, 그 너머의 <한량>을 ‘산’과 그곳에 머무는 ‘한량‘에 비유해 보게 하는 곽인탄 작가는 그간 조각이란 입체적인 매체를 다루면서도 도판, 스크린, 프레임과 같은 평면적인 속성의 키워드들을 안고 가야만 했던 이유를 풀어보는 듯하다. 이것은 자신의 작품을 지켜봐 온 관객을 위한 것이기도 하나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한 수순이기도 하다. 작품 앞에선 작가 역시도 한량을 바라보며 그가 이야기하는 세상을 듣는 위치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산속 한량 되기 – ‘배경’이라는 산
곽인탄 작가가 한량과 마주 보고자 했다면, 김도연 작가는 한량을 삼켜버린다. 작가가 한량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가 한량이 되었다는 추측은 이상하리만치 아무것도 없는 산, 그 풍경을 그린 작가의 화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동안 김도연 작가는 회화는 누구라고 일컬을 수 없는, 종을 한정할 수 없는 존재들로 가득했다. 새의 얼굴을 한 사람이나(<알을 낳고 날아간 새>(2023)),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통은 뱀인 생명체(<그 날의 달을 찾아가보자>(2020)), 사람의 형상에서 완전히 멀어져 사슴의 얼굴과 용의 몸이 접합된 동물(<십이지의 목욕>(2023))이 그 예다. 꿈속에서나 볼법한 비현실적인 존재들로 형언하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그의 작품은 “형상 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엮으려는 시도를 거부”[3]함으로써 언어로 정제할 수 없는 삶의 풍성함을 담지하고자 했다. 이는 질병을 겪는 가운데 분명히 느꼈던 촉각적 자극, 눈앞에 펼쳐졌던 환상적인 장면, 그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모두 포착할 수 없는 세상만사에 대한 관심, 그것의 공유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작가의 의지로부터 촉발된다.
그런 김도연 작가는 전시 《산-한량》에서 등장인물이 삭제된 풍경을 선보인다. 이는 개별자들이 품고 있는 고유한 서사를 중시하는 작가로서는 꽤 파격적인 행보다. 그간 그들의 이야기로 그림을 이끌어 갔었는데, ‘그들’을 전부 없애버렸으니 말이다. 게다가 ‘배경’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에서 <산> 시리즈는 그의 작업 세계에서 획기적인 것이 된다. 이제까지 그의 작품 속 배경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거나 일상에서 만나는 익숙한 풍경으로 가볍게 채워졌었다. 허나 <산>은 등장인물의 주변 정경이 되었던/될만한 ‘산’을 화면 전면에 내세우며 ‘배경’으로서의 산의 꼴을 파고든다.
일견 지금까지의 작업과 다른 방향성을 갖는 듯한 <산> 시리즈는, 그러나, 공존과 소통을 지향하는 작가의 태도를 심화한다. 이는 화면의 구성과 그리기 기법으로 가능해지는데, 먼저 ‘산’이라는 ‘배경‘을 그림의 중심으로 옮겨온 데에서 고정성을 지양하는 작가의 태도를 읽어 내릴 수 있다. 이따금 배경으로만 등장했던 ‘산’을 중심 소재로 삼으며 작가는 주체와 객체의 자리가 언제든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주체와 객체가 멈춰진 시공 속에 불변의 관점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 차원에서 언제든 능동적으로 자리바꿈이 가능한 존재라는 점, 이들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유동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그림에서 산의 비중을 달리하는 것으로 그림 속 존재들의 동등함을 설명하는 가운데, 작가는 이를 관망하는 역동적인 시점으로 관객이 개입할 수 있는 틈을 열어젖힌다. 언뜻 보아 <산>은 멀리서 본 고즈넉한 산의 모습을 평범하게 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은 여러 개의 소실점을 둔 다중 시점과 원근감을 해치는 회화 기법으로 비현실적인 풍경을 묘사한다. <산(무지개동산)>(2023)[4]만 보더라도 두 개의 소실점이 있다. 그림의 아래쪽에 빽빽이 그려진 나무들은 숲을 눈높이에서 가까이 바라본 모습이지만 그 뒤 펼쳐진 풍경은 멀고 높은 데에서 산을 45도 각도로 내려다본 모습이다. <산(라이온킹)>(2023)의 경우 보는 이와 가까이 놓인 화염산을 오일 파스텔로 러프하게, 멀찍이 뒤편에 펼쳐진 산세를 공필법으로 세세히 그려내며 원근감을 파괴하는 묘사를 보여준다. 원근감을 제대로 구현하고자 했다면 두 기법은 사실 역전되어야 한다. 가까이 놓인 것이 세밀하게, 멀리 위치한 것이 둔탁하게 그려지는 게 보통이니 말이다. 이런 파편적이고 자유분방한 조망은 오래전 권좌에서 내려온 단안(單眼)의 한계를 떠올리게 한다. 미동없는 단 한 개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자명한 사실을. 그러면서 작가는 유서 깊은 예술적 기교가 붕괴된 그 자리에 몸 없이 그저 방관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자리에 발 딛고 풍경을 ‘보는 이’를 세운다. 시간, 공간, 그리고 그 안에 놓인 대상이 불확정적인 관계에 있음을 주지시키며 그 안에 자리를 잡고 눈 앞의 대상들을 재배열하는/해야만 하는, 능동성과 자율성이 있는 ‘보는 이’로서의 존재감을 자각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다각도로 열린 시점은 다른 시선 또한 허용하며, 자신이 보는 풍경을 관객과 공유하고자 했던 작가의 바람을 실현시킨다.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것은, 그렇다 한들 김도연 작가가 원근법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산>은 여전히 원근법을 고수하며 첩첩산중으로 전개된다. 원근법의 불완전성을 인정함에도 그것을 여전히 이고 가는 이유는 그것이 환경과 주체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고 있는 까닭이다. 소실점을 상정하고 개진되는 회화의 부분들은 산, 보는 이가 서로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드러내며 작가가 산을 바라보고 있게끔, 작가를 산속을 거니는 한량으로 여길 수 있게끔 한다. 허나 이때 한량은 작가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어그러진 원근법 속에서 관객 또한 자신만의 관점으로 산의 형세를 터득해야 하는 또 다른 한량으로 초대된다. 이렇게 작가는 무미건조한 시점을 중첩시키는 것으로 교감의 기회를 마련한다.
이처럼 《산-한량》에서 곽인탄, 김도연 작가는 각자 한량이 되어 각기 다른 산을 탄다. 하지만 이들은 이따금 서로의 처지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지형을 나누곤 하는데, 곽인탄 작가는 김도연 작가가 사용한 물감 색깔을 자신의 조각을 채색하기 위한 페인트 색깔로 채택하고, 김도연 작가는 자신이 그린 <산>을 곽인탄 작가가 만든 <한량>의 배경으로 기꺼이 내어준다. 서두에서 언급한 죽란시사의 우연스럽지만 예견된 모임 날처럼, 그들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만나 한량과 산의 외연을 확장한다. ‘평면’을 ‘회화’와, ‘배경’을 ‘공간’이라는 키워드와 연결지어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교류 덕분이다. 그간 주변화된 소재를 작품의 중심으로 끌어와 그들의 관심사와 주제는 한층 넓어졌지만, 그럼에도 각자가 걷는 길을 명확히 하는 이 프로젝트성 전시[5]는 한량과 같이 관대한 마음으로 통속과 거리를 두려는 서로의 노력을 응원하며 첫걸음을 뗀다.
[1] 18세기 당시 한량이라고 불리던 이들의 사교 모임인 죽란시사(竹欄詩社), 그들의 서첩에 적힌 글귀의 일부다. 죽란시사는 정조 재위기의 태평시대에 서울과 인근에 거주하면서 초급 관리 시절을 보내던 청년들이 친목 모임으로, 정약용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다. 인용한 부분은 그들의 모임 날에 관한 설명이다.
[2] 일찍이 하이데거는 우리가 ‘세계상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재와의 본질적인 만남보다, 이미지(상)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고,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세상을 만드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이다.(W.J.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지의 삶과 사랑』, 김전유경 옮김, 그린비, 2010, pp.5-6) 곽인탄, 김도연 작가의 작품이 세상의 ‘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가가 세계상의 시대에 진입했다는 것을 진즉에 알아차리고 있지 않았을까 예상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우리가 상으로 밖에 이야기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음을 이해했던 것 같다.
[3] 유은순, 「김도연: 천천히 흐르는 발화하는 빛」, 2019
[4] <산> 시리즈의 작품들은 본래 모두 <산>이라는 제목으로 《산-한량》에 전시되었지만, 시리즈 중 일부는 《산-한량》에서의 관객의 감상평을 수용한 부제를 달고 전시 《무수히 뚫린 창과 여려 겹의 세계》(신한갤러리, 2024)에 출품되었다.
[5] 《산-한량》 이후 곽인탄, 김도연 작가는 《바다-노인》, 《하늘-님》이라는 두 번의 이인전을 더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