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뚫린 창과 여러 겹의 세계》
Countless Windows and a World of Layers

김도연, 김효진, 안부, 양승원, 임현영(기획)
Kim Doyeon, Kim Hyojin, Anbuh, Yang Seungwon, Lim Hyounyoung

2024. 7. 12 – 8. 23

신한갤러리

서울시 강남구 역삼로 251 | 화~토 10:30~18:30 (일, 월 및 공휴일 휴관) | T. 02 2161 7684 / 7678 | www.beautifulshinhan.co.kr 






















<함께 살아가는 것들>, 광목에 유채, 170x120cm, 2024





<빛과 겹의 풍경>, 광목에 유채, 170x909.5cm, 2024







<함께 살아있는 것들>, 나무에 유토, 45x40x17.2cm, 2024






오늘날의 풍경은 스펙터클, 즉 그저 보인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현실의 형상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실제의 아우라를 똑같이 복제하려는 시도는 풍경을 매혹적인 이미지로 제시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시공간적 사유로부터 차단된 이미지는 깨진 거울의 파편처럼 풍경의 한정된 부분만을 ‘투명하게’ 비춘다. 이때 투명성은 풍경의 성립을 허용하는 최소 조건인 ‘거리’의 부재와 동의어이며, 같은 맥락에서 전시 《무수히 뚫린 창과 여러 겹의 세계》는 축적된 경험과 텍스트를 모조리 상실한 풍경을 투명하고도 납작한 레이어에 비유한다.1

한편 전시에서 레이어는 또 다른 함의를 지니게 되는데, 개인이 속한 세계의 살(flesh)인 동시에 개인의 내부와 외부를 매개하는 경계라는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최소 단위이자 풍경이라는 공간적 개념을 물리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레이어에 주목하는 참여 작가 김도연, 김효진, 안부, 양승원은 레이어를 묶었다 풀기,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최소 조건으로서의 거리, 세계와의 대면을 허용하면서도 인간이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게 제어하는 정도의 적정 거리를 복구하기 위해서다.2 미디어와 풍경이 별개로 조직되기보다 늘 서로를 견인하고 추동해 왔음에 비추어볼 때, 이는 회화와 사진이라는 매체(medium)를 경유해 풍경의 몸(body)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3

❏ 김도연과 김효진에게 풍경이란 그와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다만 분명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비밀스러운 감각의 차원이 현실화한 결과이다. 이들은 동질적이기에 공허한 풍경에 그와 대조되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채워 넣으며 이미지의 순수성과 투명성에 저항한다. 김도연은 풍경이 주조되는 관습적인 시각성과 서사를 의심하며 그로부터 ‘눈에 지각되는 빛’으로부터 ‘몸이 뿜어내는’, ‘생명력이 진동하는’ 강렬한 강도로의 빛으로 이행한다. 그에게 이미지는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타자들이 임시로 살갗을 뒤집어쓴 채 출현하는 곳으로, 화면을 채우고 있는 유사-인간, 유사-자연의 형상은 레이어의 맨 밑바닥에 자리한 존재들의 손금과 나이테를 더듬고자 한 흔적으로 새겨진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주목하는 일은 김효진의 작업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다만, 이 경우 풍경은 작가의 초상에 보다 가깝게 조성되는데, 그가 감정적 생존을 중시한 결과 가변적이고 불확실한 정서와 오래된 문화적 코드 사이의 지점에 풍경을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내부로의 침잠이 낳는 고립과 단절을 방지하고자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고, 외부 세계에 자신의 주관을 투사해 각종 광물과 식물, 기후가 혼재된 환상적 풍경을 발명하는 것이다.

한편, 두 작가 모두 장지와 천을 바탕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지가 겹의 물성을 살리는 데 최적화된 재료로서 형상을 밑으로부터 건져 올린다면, 천은 물감의 엉겨 붙음과 실의 수놓아짐처럼 두께를 허용함으로써 촉각적 질감을 활성화한다. 거대한 천과의 대면으로 지지체와 신체의 역학관계에 대해 사유하는 김도연과 원단의 기존 패턴 위로 또 다른 이미지를 덧붙여 변칙적 풍경을 만드는 김효진은 천 조각들을 배열해 이어붙이고 프레임화하며 낱개의 장면이 아닌 시퀀스로서의 풍경을 제시하고자 한다.

❐ 그런가 하면 안부와 양승원은 관성적으로 흘러가는 풍경 이미지의 흐름을 다른 곳으로 전환하거나 소위 ‘사진적 본성’이라 불리는 지표적 현실성을 뒤흔드는 작업으로 풍경 사진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의 범위를 다시 측정한다. 안부는 이미지로서는 상투적이지만 현실에서는 충분히 낯설 수 있는 풍경을 도시의 거주민이자 이방인의 신분으로 발견한다. 매일 변화하는 도시를 배경으로 삼는 그의 사진은 소멸의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기묘한 안정을 제공하는 대상과 순간을 향한다. 작가는 이들을 붙잡지 않고 계속해서 흘려보내며, 결과가 아닌 과정의 기록, 목적지가 없거나 영원히 실현되지 않는 예고로서 사진을 대한다. 해상도를 의도적으로 낮추거나 사진을 이리저리 흔들리고 번지게 만들어 완결된 이미지 대신 과정의 우연성과 불확정성을 부각하는 것이다. 걸음과 시선의 방향을 고정하지 않는 이 종착지 없는 사진들은 내내 생성되고 소거되는 인덱스의 불완전함 속에 주어진 풍경으로부터의 이탈을 시도한다.

양승원은 재현과 표현 사이, 조형적 충동과 리얼리즘적 충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미지 실험을 통해 ‘무엇을 풍경으로 인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내놓는다.4 풍경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에서 인식론적 접근으로의 이러한 확장은 그가 사진과 물리적 실존을 동일 선상에 두지 않기에 가능하며, 이를 뒤집은 그의 작업은 사진의 또 다른 역사-자연의 근본적인 변형과 조작 가능성-에 기반한다. 실재를 허구로, 허구를 실재로 만드는 오늘날의 이미지 생성 체계 안에서 작가는 기계적 명료함에 대한 불신을 동력 삼아 직접 촬영한 사진과 3D 모델링 이미지가 뒤섞인 인공적인 풍경을 제조한다. 기억이 다른 기억으로 덮일 때 발생하는 왜곡과 변이처럼, 레이어와 레이어가 포개지며 형성된 이 사진-이미지는 인간이 부수고 만들어낸 무수한 스펙터클의 대척점에 있을 제3의 풍경을 가상과 실재의 접촉면에서 상상하게 한다.

이처럼 그리기의 근원적 충동에서 출발한 회화와 현실을 끌어들이면서도 끊임없이 그 바깥을 모색하는 사진은 겹겹이 쌓인 레이어들의 양 끝에서 전시라는 하나의 거대한 풍경을 작동시킨다. 회화와 사진이 공유하는 ‘평면’이라는 특질은 이들의 외형적 유사성을 지시할 뿐 아니라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각 매체의 속성이 사실 일렬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음을 상기한다. 《무수히 뚫린 창과 여러 겹의 세계》의 작가들은 그 위를 자유로이 유영하며 레이어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그 안팎에 존재하는, 쉬이 헤아려질 수 없는 장면들을 빼내 관객과 공유한다.


1 더 넓은 범위에서 투명성은 무분별한 사물화가 기인한 응시의 폭력성, 자본의 척도에 의한 경험의 선별, 너머를 볼 수 없게 만드는 매끄러운 스크린의 속성에 대한 비판조를 포함한다.
2 이한범, 「역사를 위한 아토피아: <우로보로스>의 풍경」, 『오큘로』, 유운성 외 엮음(서울: 미디어버스, 2018), 43.
3 풍경의 생산과 미디어의 출현, 그리고 시각 경험이 갖는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사토 겐지, 『풍경의 생산, 풍경의 해방』, 정인선 옮김(서울: 현실문화, 2020), 195-241.
4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영화의 이론: 물리적 현실의 구원』, 김태환 외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24), 4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