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노인》
2024.10.11-11.07
곽인탄, 김도연
CASE SEOUL
서울 성북구 장위로 83-4
운영시간 : 수-일 13시-19시
《바다-노인》은 곽인탄, 김도연의 두 번째 전시이다. 2023년 10월에 선보인 《산-한량》은 풍경과 주체를 역전시켜 각자의 매체연구에서 새로운 교차 시도를 모색했다. 이번 전시 역시 두 작가의 교차연구는 이어지나 개인의 기억을 중심으로 서로의 화답을 중첩하여 새로운 맥락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산속 한량이 바다가 되고(곽인탄), 한량을 머금었던 산이 노인이 되어(김도연) 구축한 그림과 조각의 다채로운 경관을 즐겁게 마주하고 들어주기를 바란다.
곽인탄은 이번 전시에서 어떠한 형상을 그리지도 만들지도 않는다. 작업실 구석에 오랜 시간동안 펼쳐져 있던 여러 잔여물들을 점토에 반죽하여 김도연이 그리는 형상을 바다의 풍경으로 해체하여 오로지 색과 두께만으로 두터운 층을 쌓는 과정을 반복한다. 다양한 두께가 중첩되어 이룬 바다 풍경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평온함을 소망한다.
김도연의 형상은 계속해서 생성하고 허물어지길 반복한다. 공자의 말에,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혜로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을 물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냥 서서 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말했다. 여기에 살바도르 달리가 말한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말한다.’라는 문장을 덧붙이겠다.
새로이 태어난 솔개의 첫 바다, 장지에 색연필과 유채, 116.8x91.0cm, 2024
끝없는 텔로미어의 여행, 장지에 아크릴과 유채, 116.8x91.0cm, 2024
상상적인 것과의 만남, 레진, 수성 퍼티, 철, 아이소핑크, 우레탄 폼에 아크릴과 유채, 163x67x49cm, 2024
1. 김도연, 새로이 태어난 솔개의 첫 바다, 장지에 색연필과 유채, 116.8x91.0cm, 2024
올 초에 서해를 가게 되었어요. 태안 갯벌은 겨울 철새들이 찾아오는 곳이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동물원이 아닌 곳에서 그렇 게 큰 독수리는 처음 만났어요. 한반도에서 만나는 독수리는 대개 3,000km 이상 떨어진 몽골에서 날아오며 해마다 11월부터 넉 달가량 한반도에서 겨울을 보낸대요. 몇 날 며칠을 날아온 걸까요?
독수리에 한 가지 재밌는 우화가 있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선 ‘솔개식 개혁’이라고 일컫는데요. 솔개는 70살까지 살 수 있대요. 그러나 40살이 되면 털이 너무 많아져 날개가 무거워지고, 부리와 발톱은 너무 길게 휘어 먹이를 먹거나 쥘 수 없게 된대요. 이때 솔개는 양자택일에 놓이는데, 그대로 굶어 죽는 것과 갱생의 길을 걷는 것이래요. 후자의 길을 택하는 40살의 솔개는 더 살기 위해 먼저 바위를 쪼아 부리를 깬대요. 그 뒤 새로운 부리가 나오면 발톱을 모두 뽑아내고, 다시 발톱이 나면 깃털을 모두 뽑아낸대요. 그렇게 가벼워진 날개와 새로 난 부리, 발톱으로 30년의 생을 더 살아간답니다. 환골탈태, 늙음과 죽음의 벽 앞에서 솔개는 스스로 새로운 삶의 문을 연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는 모두 거짓이랍니다. 이 우화는 2~4세기에 처음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피지올로구스라는 중세 초 동물학 서적에나 나오는 오래된 이야기로 보통 불사조나 유니콘과 같은 전승이 모아있는 우화집이라고 하네요. 또한 실제로 조류는 부리를 다치면 생명을 유지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동물에 빗대어 꾸며낸 인간의 많은 이야기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세상의 사유에 관한 인간의 꿈꾸는 노래이자 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2. 곽인탄, 갯벌, 나무 위에 수성 퍼티, 아크릴릭, 레진, 톱밥, 101×60×5 cm, 2024
갯벌에서 독수리를 저도 봤었죠. 평소에 생각했던 독수리의 모습보다 덩치가 엄청 크고 둔해 보였어요. 그때의 장면은 낯설면 서도 평온했어요. 저는 갯벌에 대한 추억이 많아요. 할아버지께서 서해 바다 근처에 사셨는데 어린 시절에 친척들과 갯벌에 자주 놀러 갔어요. 갯벌에 가는 길은 1시간 정도를 걸어야 되는 거리였는데 저에게 그 시간은 설레임이 가득했어요. 끝없이 펼쳐진 논길 사이로 노랗게 익은 벼를 손으로 가지고 놀면서 갯벌을 향해 걷는 시간은 풍성하고 행복했어요. 그렇게 마주한 광활한 갯벌은 저의 거대한 놀이터였어요. 갯벌은 바다 생물의 분해물이 쌓여 만들어진 노출된 진흙 층으로서, 여러 생물에 있어 중요한 생태계가 되죠. 수많은 물질들이 퇴적되어 이룬 진흙의 두께는 얼마나 두터울까요. 저도 갯벌에서 몸으로 경험했 던 감각을 회상하며 그동안 모아뒀던 작업의 잔해물을 점토에 반죽하여 두터운 층을 만들어보려 해요. 잔해물이 다채로운 컬 러의 점토와 반죽되어 평면 위에 펼쳐질거에요. 그리고 도연 작가님이 그린 풀이 자라난 갯벌 위의 독수리는 저의 작업에서 모두 해체되어 오로지 색과 질감으로 새롭게 표현될 거에요.
3. 김도연, 끝없는 텔로미어의 여행, 장지에 아크릴과 유채, 116.8x91.0cm, 2024
인탄 작가님이 가지고 놀았던 갯벌의 층들을 상상해 보니 떠오르는 또 하나의 생명체가 있어요. 평생 늙어 죽지 않는 존재로 불리는 바닷가재요. 지구 생명체의 수명은 ‘텔로미어(telomere)’가 결정한대요. 텔로미어는 염색체 가닥의 양쪽 끝에 붙어 있는 꼬리로서, 염색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해요. 그러나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길이가 점점 짧아지는데 텔로미어가 짧아져 사라지 면 생명체는 죽게 되죠. 바닷가재는 텔로미어를 복구하는 신기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요. 하지만 평생의 성장이 반복하기에 계 속해서 탈피해야 하는데, 탈피 후 껍질이 연할 때 먹잇감이 되거나 혹은 연속되는 탈피에 지쳐 포기해 죽는다고 합니다. 기네 스북에 등재된 가장 오래 산 바닷가재도 200살 정도밖에 안된대요. 작가님의 어릴 적 그 갯벌에도 탈피한 바닷가재의 껍질들 이 무한히 쌓여 있었겠죠? 성장을 하기 위해 수십번의 탈피를 했던 어린 바닷가재의 흔적도 있었겠지만, 영원히 늙지 않는 바닷가재의 운명도 있었을 것 같네요.
4. 곽인탄, 푸른 살, 레진, 석고, 수성 퍼티, 철, 스텐, 각종 잔여물, 67×25×15 cm, 2024
도연 작가님이 이야기해주신 평생 늙어 죽지 않는 바닷가재가 너무 흥미롭네요. 탈피를 계속 할 수만 있다면 생명이 무한하 다는게 신비로워요. 저는 여기서 바닷가재의 껍질과 살에 영감을 얻었는데요. 제 작업실 구석, 구석에는 이전 작품에서 파생 된 온갖 잔여물들이 쌓여 있어요. 어떻게 보면, 저의 작품들의 껍질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조각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재 료들이 찌꺼기처럼 쌓여가요. 이번에 도연 작가님이 그리는 바닷가재를 보고 저는 작업실에서 껍데기와 유사한 잔여물을 찾 았어요. 그것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의 구조이며 이 금속 껍데기 내부에서 바깥으로 살들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제작 하고 있어요. 작가님이 그린 바닷가재는 푸른 색의 껍질이더라고요. 굉장히 신비로운 색을 가진 가재라고 생각을 했고, 왜 푸 른 색을 띠고 있는지 궁금해요. 평소에 제가 파란색 계열의 점토를 자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오로지 파란색 계열 점 토만으로 푸른 가재의 탈피과정을 작업으로 표현해보려고 해요. 단단한 금속 껍질 틈새로 푸른 살이 삐져나오게 되고 제가 모아놓은 점토 잔여물, 페인트 찌꺼기, 톱밥과 같은 다양한 부산물들이 푸른 점토와 혼합되면서 살의 질감이 풍성해질거에요. 저는 탈피된 껍질을 금속 재질의 직육면체 관으로 제작하고 그 내부에서 바깥으로 푸른 살의 바닷가재를 밀어내기로 했어요. 그리고 이 작업을 하면서 평온한 상태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어요.
5. 김도연, 상상적인 것과의 만남, 레진, 수성 퍼티, 철, 아이소핑크, 우레탄 폼에 아크릴과 유채, 163x67x49cm, 2024
평온이라. 고요하고 잔잔한 상태는 어떤 세계일까요? 저는 모든 걸 다 삼켜버리고 없어진 황량한 세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 름마다 많이 접하는 뉴스가 하나 있어요. 해루질로 고립되고 익수하는 사고의 이야기입니다. 해루질이란, 밤에 얕은 바다에서 맨손으로 어패류를 잡는 일을 말해요. 수년째 이어지는 이 사고는 방향감각을 상실했을 때 벌어져요. 바닷길을 잃어버리면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가 물이 차오르면서 바다 한가운데에 고립된다고 합니다. 장황할 수 있지만, 고립의 단어에서 저는 소설 『모비 딕』의 바다와 고래를 상상하게 되었어요. 주인공에게 육지는 안전하지만 희망이 없는 삶이고, 바다 는 안전하지는 않지만 희망이 있는 삶이었죠. 그 바다에서 가장 큰 동물이자 대자연의 섭리 안에서 유유히 살아 가는 고래에 게 도전한 인간의 마지막을 지켜봅니다. 바다와 고래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거대한 동심원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당겨 삼켜 버렸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주인공은 죽음을 앞두고 만들어 두었던 퀴퀘크의 관이 그에게 생명의 부표가 되어 표류하다 구조 됩니다. 바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아름답고도 은밀하며 무자비한 염원의 세계 같아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좋을지, 안 좋을지를 오늘도 고민하며 인간보다 거대한 존재들과 공존하는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암초가 되어버린 사람의 얼굴과 새의 몸을 가진 바다의 요정을 다시 불러냈습니다. 이 요정을 육지의 네 발 달린 자의 긴 목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지하세계의 뱀은 몸통의 끝에서 끊임없이 탈피합니다. 이 존재가 깊은 바닷물 속에서 방 향성을 잃은 자를 휘감는 노래로 불러와 무한한 재생의 희망을 이어가기를 상상해 봅니다.
6. 곽인탄, 출렁이는 꽃, 나무 위에 레진, 수성 퍼티, 아크릴릭, 금속 망, 57×57×9 cm, 2024
바다 위에서 출렁이고 있는 꽃을 상상하게 됐어요. 고립된 세계에 갇힌 마음은 파도와 함께 소용돌이 치고 있고요. 이번에 도 연 작가님의 마지막 작업은 최근에 그렸던 여러 생명체들이 부피가 있는 조각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저의 바다 풍경 작업들 사이에 놓인 이 작품과 어떻게 상호작용하게 될지 궁금하네요. 인간과 동물, 자연이 공존하는 풍경을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표 현하는 도연 작가님의 세계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걸까요?
제가 마지막으로 만든 이 작품은 수많은 꽃으로 이루어진 풍경이 됐어요. 작업을 하다 보면 낯설게 전개되는 경우가 많아요. 어쨌든, 저는 파도에 출렁이는 꽃들을 생각하며 화사한 바다 풍경을 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