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풀 프로덕션
《이제 침대를 망가뜨려 볼까 Cut off the Bed》12.Dec.2020 - 19.Jan.2020

*POOLAP 프로그램과 전시는 작가 김정헌 선생님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전시명: 이제 침대를 망가뜨려 볼까
○ 작가: 김도연, 김태연, 송세진, 이지현
○ 기획: 김선옥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김형준
○ 기간: 2019년 12월 12일(목) ~ 2020년 1월 19일(일)
○ 오프닝: 2019년 12월 12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12월 25일, 1월 1일 휴관)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차가 불가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행인을 붙잡아 침대에 눕힌 뒤 침대보다 크면 다리를 잘라내고, 침대보다 작으면 다리를 늘여서 죽였다. 사실, 그의 침대에는 멋대로 크기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어서 침대에 꼭 맞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꿈이었을 뿐이야"라며 내가 본 것을 침대 안의 망상에 가두려는 사람들, 내 침대에서 내가 취해도 되는 몸짓과 자세는 정해져 있다는 사람들, 그 틀을 벗어나면 굴러떨어질 거라고 경고하는 사람들은 도처에 널렸다. 익숙하고 포근한 침대에 의심없이 몸을 누이는 것이 위험함을 깨닫는 순간, 서둘러 할 일은 이제, 그 침대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물과 빛 그리고 구름 속에 절지 된, 화난 영모, 장지에 유화, 156x112cm, 2019







짜내지 않고 튕겨내기, 장지에 유화, 76x53.1cm, 2019






칠렁이는 랑데뷰의 고고한 빛, 장지에 유화, 72x130cm, 2019





어둠이 말하게 하라, 천에 유화, 172x128cm, 500cm, 2019






짊어지고 쫓아가는 길베, 한지 및 혼합재료에 유화, 64x60x53cm, 2019





나를 드러내는 것: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김선옥(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자꾸 힘이 들어갔다. 어깨와 팔,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얄팍한 개념과 과장된 수사들로 그들의 작업을 한 데 묶어 치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주제 기획전이 아니라고 스스로 거리를 두면서도, 그들의 몸집보다 크고 거대한 옷에 그들을 가두고 나도 모르게 그들의 작업을 하나의 기준에 끼워 맞추고 있었다.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내 멋대로 그들의 작업을 재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풀랩’의 동력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다른 언어들이 한자리에 만나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과정인데, 나는 오만하게도 그것을 벌써 잊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나 인터뷰를 했던 6월의 그 날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올해 ‘풀랩’에 지원한 작가들은 유난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았고, 매체와 형식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려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자신만의 언어를 세심하게 고르는 중이었다. 30분 안팎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터뷰 시간 동안 그들이 조심스럽게 꺼내 놓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최종 선정된 작가들과 만나 세미나를 진행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가끔 뭉클한 순간들이 많았다. 비록 동일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나는 그들과 같은 고민의 궤도를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세계를 보는 나의 시선은 많이 바뀌었다. 밖으로만 돌던 관심이 이제는 점차 내 안을 향하기 시작했고, 뒤늦게 작은 세계를 천천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드러내는 것들에 서툴지만 더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다. 

* * *


《이제 침대를 망가뜨려 볼까》에 참여하는4인의 작가들(김도연, 김태연, 송세진, 이지현)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지만, 대담하게 들려준다. 이들의 작업은 미시적 시선을 통해서만 보이는 일상에 숨겨진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 이야기들을 함께 들어보려 한다. 

김도연은 무의식의 세계를 구체적인 형상들로 기록하는데, 그 모든 기록은 몸의 감각에 의존한다. 그에게 그리는 행위는 형태가 분명치 않은 경험의 기록이자,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흩어져 있던 이미지의 잔상들을 하나로 모은 그의 이야기는 우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꼭 그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행위에 가깝다. 그것들은 전체로서 서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분절된 이미지들의 집합체이다. 작가는 밑 작업을 생략한 채 바로 그리기 시작함으로써, 재료를 화면에 빠르게 안착시키면서 화면과 내밀하고 신체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마치 그의 몸이 기억하는 세계처럼. 천에 그릴 때의 악력은 작가의 흔적을 빛에 따라 다르게 드러낸다. (<어둠이 말하게 하라>) 그림의 표면 너머로 더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 작가는 기름의 흔적을 남길 곳을 세심하게 고른다. 절지된 장지 위에 마치 ‘낙서’ 같은 형상들을 새기는 것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며, 그에게 과거는 대상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감각할 수만 있는 빛과 닮았다. (<물과 빛 그리고 구름 속에 절지된 화난영모>) 기름이 한지에 엉겨 붙은 덩어리는 서서히 갈변하며 시공간의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것을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길을 지칭하는 ‘길베’라 부르기로 한다. (<짊어지고 쫓아가는 길베>) 

김태연은 불완전한 제도 안에서 작업을 지속하기 위한 조건에서 출발한다. 그는 작업하기 위해 필요한 물리적 환경을 스스로 제시하며 현실적 제약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에게 도구는 기능적 쓰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형태가 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지지대가 겹쳐진 가변크기의 기둥<가능의 구조>는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구조물로 다른 구조물을 떠받치며 보조했던 역할에서 벗어나 비로소 스스로 공간을 주체적으로 점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줄자는 물리적인 길이를 재는 도구적 기능을 소거하고, 형태를 지닌 가느다란 좌대 위의 조각이 되었다. (<뭐든 춤>) 형태가 몸을 갖기 위해 골격에 살을 붙여 물성을 두르고 단단해지는 과정은 김태연이 미술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과 흡사하다. 어찌 보면 고집스럽지만, 조심스럽고, 유난스럽지 않은 이 움직임은 ‘조각’을 손에서 놓지 않는 작가와 닮았다. 그래서, 그에게 조각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작은 창구일 것이다. 

송세진은 인종, 젠더, 이념 등으로 분열된 세계를 미술의 언어를 통해 구조를 드러내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그 안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찾으려 한다. 그의 이야기는 대체로 3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그것은 자신을 객관화하고 또 타자화하면서 자신과 거리를 두기 위함이다. 유리 매체를 전공하면서 경험한 ‘블로잉’(Blowing)이라는 유리 제작 방식에 뿌리 깊게 남은 ‘성 역할’(gender role)에 의문을 제기하고, 남성 중심적인 권력 구도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신격화’된 유리의 숨을 빼 버리고 탑을 쌓았다가 무너뜨린다. () 드랙퀸 ‘RuPaul’의 립싱크 퍼포먼스를 차용한는 트럼프의 연설 장면,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 그리고 박근혜의 탄핵 집회 장면을 오버랩하여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서로 다른 신념과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동시에 ‘국가’와 ‘희망’을 반복적으로 말하는 장면은 모순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다. 송세진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은 소수의 나약함이 아닌, 기존의 질서가 무너질 때 소수가 아닌 자들이 느끼게 되는 ‘불편함’이며 권력이 해체되는 장면이다. 마치 유리 조형물에 숨이 빠져 외피만으로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을 때, 비로소 그 오브제가 ‘다르게’ 읽히는 것처럼. 

이지현의 작업 태도가 변한 것은 사회적 죽음(세월호 사건)과 개인적 죽음(자살한 이웃)을 목격한 이후라고 한다. 회화 작가로서 재현을 항상 마주할 수밖에 없는 그에게 구상적 재현의 실패는 오히려 추상적인 ‘감정’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지현의 그림에서 재현된 여성은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해방된 존재들이다. 몸을 뒤로 훌쩍 젖히고 목젖과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 여성들의 표정은 특히 아시아권 여성이 재현되는 전형적인 방식을 빗겨 나간다. 그의 작업은 2018년 낙태가 합법화되었을 때 기뻐하는 아일랜드 여성들은 담은 한 보도사진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들은 기쁨의 환희를 넘어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은 결코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입가에 미소만 띤 채 ‘얌전히’ 웃지 않는다. (<우악스럽게 웃기>) 그래서, 이지현의 그림은 소위 ‘여성스러운 연약함’ 같은 클리셰로 여성성을 재현해온 관성적인 방식에 저항하며,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성을 드러낸다. 그의 그림은 대상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최근 들어 더욱 과감한 색면과 젠더의 구분이 모호해진 형상을 보여주며, 표면은 평면성을 거부하는 몸짓을 드러낸다. (<투명한 얼룩>) 구상에서 추상, 혹은 평면에서 입체를 넘나들면서 그가 찾아내려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해방’시키는 회화의 힘일 것이다. 

* * *


 춤을 출 인간은 죽게 될 것이다-아름다움을 모조리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그 어떤 것이든 해낼 수 있을 때. 네가 등장하면 창백함-아니다, 나는 공포가 아니라, 그 반대, 그러니까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을 어떤 대담함에 대해 말하려 한다-어떤 창백함이 너를 뒤덮어버릴 것이다. […] 그 무엇도 더 이상 너를 바닥에 묶어 놓지 않은 그런 상태에서 너는 떨어지지 않고 춤출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외줄 위로 등장하기 전에 죽을 수 있게, 그리고 시체 하나가 외줄 위에서 춤을 추게 신경 써야 한다.”[1](장 주네(Jean Genet), 「외줄타기 곡예사」 중)

얼마 전 어떤 이가 신체를 갑자기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된 순간 “파란빛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작업에서 그 빛을 좇고 있다 했다. 대화가 끝난 후에도 이 말이 꽤 오랫동안 내 입안에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는데, 고통의 경험을 저리 비유한 그의 감각보다, 저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말하게 되기까지 그가 혼자 겪었을 지독한 시간이 어렴풋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술은 각자의 체화된 세계가 외부로 드러날 수 있는, 어둠 속에서 작은 신호를 보내는 그런 빛의 울렁임이 아닐까. 그래서, 이 위태롭고 치열한 일은 설사 타인의 이야기일지라도, 결국 자신을 대면하는 과정일 것이다. 장 주네(Jean Genet)가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곡예사의 고독을 위로하고, 사회의 음지에서 웅크리고 있을 약자들의 언어를 기꺼이 대변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준 것처럼 말이다. 

이제 막 먼 길을 떠난4인의 작가들은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거나, 뚜렷한 행선지를 정해두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유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그들의 긴 여정 중 짧은 단막을 보여주는 자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다시 숨을 고르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제시한 작은 실마리를 통해 다음 장의 이야기를 추측하고 기대하면서 그들이 가고 있는 방향을 짐작할 것이다. 가끔은 그 길 가까이 수다를 청하여 말동무가 되기도, 때로는 먼 곳에서 진득하게 그들의 안부를 기다릴 것이다. 비록 각자의 종착지가 다를지라도, 긴 여정의 중간 즈음에서 우리는 그렇게 다시 서로의 동행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우연히’ 이 자리에 다 같이 모인 것처럼. 

[1]장 주네, 『사형을 언도받은 자/외줄타기 곡예사』, 조재룡 역, 워크룸프레스, 2015, pp. 134-135.






김도연: 천천히 흐르는 발화하는 빛

유은순(미학)



개인이 경험을 주관적으로 기록한다면 거기에서 읽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아주 내밀한 기록들을 접하게 될 때 우리가 흔히 고민하는 문제이다. 미시적인 서사에서 공통의 문제로 확장되는 작업도 있고 집요한 내적 탐구 과정 자체가 경이를 불러일으키는 작업도 있다. 김도연 작가의 작업은 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내적 경험에 대한 고백은 서사적이기보다 찰나를 포착하는 스냅과도 같다. 이 스냅은 순간적이지만 지속되고, 충동적이지만 축적된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통일성이나 일관성보다는 포착한다는 사실이 보다 중요하다.

2016년 김도연 작가는 각국을 여행하며 느낀 감정이나 경험들을 작은 크기의 장지에 유화로 기록하였다. 특정한 감정들은 말로 표현되기보다 그림으로 ‘기록’되었다. 작가는 사실적인 풍경보다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여 그렸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개별 작품을 보면 그때가 오롯이 떠오를 만큼 생생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순간에 충실한 이미지들은 어떤 의미로 고착되기도 전에, 말로써 그 경험을 정의내리기도 전에 완성되었으므로 의미는 채 발화되지 못하고 끝이 났고, 의미가 다가오기를 여전히 기다린다. 작업실에서 함께 작업을 돌아보면서 작가는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야 보이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경험에 관한 내용이 곧 작품에 등장하는 형상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가 보는 것(작업)과 듣는 것(작가의 경험)은 서로 평행을 이룰 뿐 만나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을 나는 보지 못했고 그가 경험한 것은 오롯이 그의 경험일 뿐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품은 내적 설득력을 가지는데, 이는 총체적 완결성으로부터 비롯되기보다 반복되고 변주되는 형상과 의미를 지연시키는 작가의 수행성으로부터 비롯된다.

때로 형상은 의미보다 선행하여 등장한다. <낮잠>(2016), <천장 녹은 욕실>(2016), <파헤치는 사람과 파헤쳐지는 사람들>(2016) 등과 같이 2016년의 작품에는 나체 여성의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는 여성에 관한 문제가 최근 자신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2016년에도 이미 그 맹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작품을 통해 사후적으로 깨달았다. 그 후 작가는 <긴 곱슬머리>(2017) 시리즈처럼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는 중성으로 인간을 묘사한다. 이렇듯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회화를 통해 축적시키고 그 경험을 다시 반추하고 재조직하면서 동일한 형상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르게 변주시킨다.

2019년 <구속의 단편> 시리즈는 2019년 3월 어느 날 그림을 더이상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르는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미래 앞에서 한 번이라도 더 무언가를 그려내고야 말리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다. 다행히도 작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막연했던 불확실함 속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담기에 급급할 만큼 많은 이미지를 순식간에 뱉어냈다. 이 연작에는 유독 ‘눈이 파인’, ‘가면을 쓴’, ‘앞을 보지 못하는’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에게는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이 ‘보지 못한다’와 동의어는 아닐까? 그렇다면 반대로, ‘볼 수 있다’는 ‘그릴 수 있다’와 대응할 것이고, 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빛’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경험의 순간을 기록하려는 작가 자신의 의지에 관하여 ‘빛’이라는 주제로 풀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행의 과정으로 보인다. 과거의 작업이 감정에 충실하여 어떤 이미지를 포착하는데 집중했다면, 이번 신작들에서는 작가 자신이 대상과 경험을 바라보는 태도에 집중한다. 따라서 빛은 단순한 모티프라기보다 작가의 회화적 실천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칠렁이는 랑데뷰의 고고한 빛>(2019)는 작가의 신체적인 조건이 빚어내는 한계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식하고 작가는 자신이 사물로부터 보는, 혹은 보려고 하는 에너지들을 표현한다. <짜내지 않고 튕겨내기>(2019)는 밤에 주로 활동하는 올빼미가 빛을 튕겨내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빛은 누군가가 대상의 형체를 식별하기 위해 필요한 외계의 것이기 보다 주체가 대상을 감각하는 능동적인 방식으로 해석된다. <짊어지고 쫒아가는 길베>(2019)는 회화와 설치가 결합된 작품이다. 구겨진 한지 산 위에 새 모양의 조각상이 있다. 새의 날개 부분에 달린 한지는 둘로 갈라져 있고 여기에는 눈이 파여 있는 혹은 눈에서 빛을 뿜어내는 인간 두 명이 이제 막 사라지려고 하는 빛을 붙잡으며 어딘가를 향하여 달려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한지는 둘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담겨있는 빛은 채 묘사되어 있지 않고 그 사이의 여백을 상상해야 한다. 앞선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회화적 실천을 반영한다.

주체의 능동성은 <어둠이 말하게 하라>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광목천의 양면을 오가며 이미지들을 그렸다. 어떤 형상은 뒷면에 흔적처럼 스며들고, 어떤 형상은 스며든 형상에 맞추어 채워졌다. 작품은 하나의 면으로만 완결되지 않고 계속 미끄러진다. 아트스페이스풀의 전면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부분들을 비추는데, 빛은 어느 특정한 부분을 밝게 비추거나 뒷면의 이미지와 중첩되는 순간들을 포착하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른 한편 작가는 화면의 일부에 유화 기름을 부었다. 작품의 보존이나 효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바탕에 변화를 주기 위함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변하는 기름은 이미지 사이를 가로지른다. 관객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빛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해나갈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방향들이 써 내려 가는 상태이기도 하고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변해가는 상태이기도 하다. 여기서 관객은 자신이 만나게 되는 작품의 상태를 바탕으로 작품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추구해야만 한다.

함께 선보이는 신작 <물과 빛 그리고 구름 속에 절제된 화난영모>(2019)는 두 종류의 각기 다른 색으로 물들인 장지에 그려낸 작품이다. 중앙에 위치한 영모와 머리 긴 사람은 두 장지에 걸쳐 가운데에 위치한다. 작가가 자신의 과거 작업을 탐색하며 그렸다는 이 작품은 여성과 남성의 구분을 넘어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 과거에 자주 등장했던 새의 형상, 다음 작업을 예비하는 빛의 형상 등이 나타난다. 각각의 형상은 유기적이기보다 서로 독립되어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한편 두 개의 다른 장지는 딱 맞게 재단되어 있지 않고 서로 어긋나 있다. 이 어긋남은 통일된 의미를 거부하며 계속해서 의미를 지연시킨다.

의도적인 지연은 작가가 채택하는 재료와 기법에서도 나타난다. 작가는 장지에 유화를 사용한다. 물을 빠르게 흡수하는 장지에 먹 대신 유화를 사용하기에, 흔적은 빠르게 남겨지기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선들이 천천히 표면에 머무른다. 캔버스의 매끄러운 표면에서 미끄러지는 순간적인 유화의 필치나 장지에서 가볍게 휘날리는 먹의 필치 대신에 장지의 거친 표면에 느리고 천천히 흔적을 남기는 유화의 생소한 조합은 순간의 감정들과 느린 기록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격차를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김도연은 작품으로부터 특정한 서사를 찾으려는 관객들의 노력을 좌절시킨다. 이는 어떤 형상의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부한다기보다 형상 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엮으려는 시도를 거부 하는 것에 가깝다.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내적 동기를 찾든 그것은 작가가 작품을 그릴 당시의 경험은 아닐 것이고, 작가가 사후적으로 찾아낸 의미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 작가 자신의 태도를 탐색하는 작업은 작가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내밀한 탐구들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작가에게도 이 모든 것은 계속해서 낯선 것이며, 주관적, 객관적 상황에 따라 작품이 새롭게 해석되고 읽히기 때문이다. 빛의 방향에 따라 이미지를 다르게 비추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에 배어든 기름이 시간이 갈수록 변색하듯이, 작품의 의미는 끊임없이 유예되며 다른 것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