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는 회화》

2021. 1. 14. ~ 1. 31.
This is not a church
화 - 일 오전 11시 - 오후 5시

참여작가: 김도연, 박경률, 이우성, 최선
기획:  유은순
코디네이팅:  권정현
그래픽디자인:  오혜진(오와이이)
작품설치:  아워레이보
장비대여:  올미디어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수행하는 회화》는 이미지 중심주의의 회화에서 눈을 돌려 수행성 개념을 바탕으로 회화적 실천을 모색한다. 전시는 회화를 작가의 실천적 결과물이자 사회적, 환경적, 시공간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구성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회화를 시각적인 감상의 대상이나 재현의 결과물로만 보기보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 신체적 행위의 결과로서 형상과 흔적, 작품이 외부적 조건에 반응하여 다층적으로 변화하는 모습 전체를 포괄하며 감상하기를 제안한다.












































  벗긴 옷과 깎은 머리, 장지에 유화, 20x18cm, 2020







‹벗긴 옷과 깎은 머리›
폴리카보네이트에 긁고 새김,장지에 유화, 80×58.7cm (2 pieces), 2020







 배는 항시 유동하는 바닷물에 떠있기에, 연선지에 유화, 98.6x68.2cm, 2017















수행 불가능성을 수행하는 회화적 비전

남웅


목적어와 주어 사이, 회화를 수행하는 회화
회화의 과정을 단조롭게 설명하면 도구를 이용해 특정 표면 안팎으로 물리적 힘을 가하여 흔적을 남기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안료를 입히고 벗겨내는 공정은 작가를 둘러싼 시공과 사물, 관념과 심상을 남긴다는 점에 공간 지향의 예술이라 하겠으나 제작 과정을 함의하는 점에 시간적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예기치 않은 질료의 일탈과 신체적 변위가 작동하는가 하면, 작중에 우연적인 사건과 즉흥적인 영감이 개입하기 쉽다. 설령 ‘평면성’과 ‘이미지’라는 회화의 필연적 조건이 수다한 변수를 걸어 잠그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회화의 부정성까지 평면성의 문법으로 설명하는 작업은 주어진 제한을 모티프 삼아 회화적 방법론을 분기해낼 수 있도록 한다. 하여 화가는 세계를 재현하지만 재현의 질서와 시각장이 형성되는 배경을 추적하고 의심하여 그리기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갱신한다.

전시 제목이 시사하듯 《수행하는 회화》는 회화의 수행성에 주안점을 두지만, ‘수행성’의 개념이 새로운 접근은 아니다. 잭슨 폴록의 추상회화를 ‘액션페인팅’으로 명명하며 퍼포먼스적 속성을 포착한 해롤드 로젠버그는 화가가 캔버스 위에서 행동을 통해 사건(event)을 만들어내는 행위자(actor)임을 명시한다. 장(arena)으로서 캔버스는 화가가 제 작업을 무대화함을 환기한다. 이는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적 순수 시각성을 분리하기 위해 배제해온 제작과정과 몸의 수행성을 전면에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모더니즘 회화 담론이 분리해내고자 했던 순수 시각성과 그것이 배제하려 했던 몸의 개입과 회화적 공간성은, 어쩌면 지금의 락다운 상황에 장려되는 비대면 체제 배후에 필요한 인프라를, 이를테면 위험을 감수하며 대면해야하는 돌봄과 이동 등의 노동의 요소들에 상응한다.)

다만 전시 제목이 수행하는 ‘작가’가 아닌 ‘회화’라는데 주목하자. 《수행하는 회화》는 로젠버그의 오랜 명제를 따르는 것 같지만, 한국어의 유연성을 고려하여 표제에 접근하면 회화는 화가가 수행하는 대상으로서 목적격뿐 아니라 그 자체로 수행하는 주격의 위상 또한 갖는다. 말하자면 질료를 달리하고 화면과 장치를 옮겨 다니며 형상과 질감을 변용해나가는 주어는 다름 아닌 이미지다. 이는 회화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강도를 갖는 프레임이자 시공간에 용적을 차지하고 있음을 상기한다. 캔버스는 작가의 심상을, 이를 그리는 손과 몸을 기억하지만 이들과 별개로 자율적인 회화적 형태가 현현하는 것이다.

회화가 무언가를 수행할 수 있다는 객체 지향 문법이 성립한다면, 수행 주체로 전제되어온 화가와 관객은 회화의 대행자이자 도구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이미지가 세계와 몸의 접경에서 이들을 표상하는 부차적 위상의 명제를 뒤집어 회화적 이미지의 회로를 통해 세계와 몸을 재해석하고 이행해나간다는 도치된 설명으로 도약한다. 수행하는 회화의 렌즈로부터 인간과 세계는 이미지로, 또는 이미지 장치로 전환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회화의 부정성을 통해 바탕면으로서 기술적 지지체(Technical Support)만을 남긴다고 진단하는 포스트 미디엄의 상황은, 캔버스와 안료를 벗어나 디지털 그래픽 픽셀이 되고 평면으로부터 표면으로서 사물로 바탕면을 옮겨다니는 탈구와 가속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다시, 인간의 노동을 극단적으로 소외시키고 자본의 자율적인 흐름을 갱신하며 자본을 바탕으로 현실성을 축조하는 금융자본의 질서에 포개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화가의 집도 아래 수행되는 회화작업은 금융자본에 가려진 노동자의 존재보다 작가 주체로서 높은 해상도와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 이미지 체제의 제약을 받고 장치의 한계를 가질지라도, 더불어 세계를 온전히 포착하고 재현할 수 없으며 상실한 것을 되찾고 복구할 수 없다는 필연적 조건을 부정할 수 없을지라도 회화는 실패 자체를 그려내는 수행상의 자율성을 확보함으로써 재현 질서의 변위를 도모한다. 주디스 버틀러의 언어로 다시 이야기한다면 회화의 수행은 이미 주어진 회화의 질서에 예속되어 있지만 질서의 윤곽을 변경하고(질서 의존적일 수밖에 없을지라도), 질서로부터 배제된 것들에 시각성을 부여하며(왜곡되고 부서지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형상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질서와 무질서 사이 이분법적 구도 자체를 절개하며 비평적 차원의 (비)재현적 장을 열어낸다. 설령 실패를 피할 수 없고 회화적 탐구의 결과가 의미 없음을 표명할지라도, 부정성 자체를 가치로 품는 회화적 수행은 주체로서 작가와 세계의 질서 또한 해체와 갱신을 거듭하도록 한다.


조각적 회화의 유예적 순환
회화는 자체의 닫힌 완결성을 깨는 동시에 영구적으로 깨나가는 상태를 한시적으로 표상하는 작품의 고정성을 갖는다. 심상과 기억의 흔적으로서 회화는, 동시에 참조대상을 지우는 작업이자 지워짐 자체의 재현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설은 망각과 기억 사이, 삼차원 시간성과 평면으로 압착된 이차원적 시간성 양안에 걸쳐 있다.

그런 점에 박경률이 전개해온 회화적 탐구는 평면성이라는 조건으로부터 질료와 강도를 조금씩 달리하며 이차원성의 외연을 탐구해온 궤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물감의 상이한 질감과 용적, 화면에 덧대는 붓질과 같은 물리적 층위의 변주는 평면의 공간을 심화한다. 스스로 일컫는 ‘조각적 회화’는 회화적 평면성이라는 통념적 이해를 벗겨내는 수행적 오용(catachresis)의 명명이다. 그것은 질료와 행위가 화면에 개입하고 회화적 효과를 남기는 과정을 고려하는 동시에, 특정한 질감과 양감이 형상과 공간을 구축하는 과정을 탐구하기 위해 고안한 비평적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다.

화면에는 단순한 도형과 선들이 분산적으로 그려져 있다. 출처와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화면은 차라리 형태의 음운론적 배치도를 연상케 한다. 선적인 서사와 연속적 의미망을 거스르는 구성은 회화적 평면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그것은 ‘구상’과 ‘추상’이라는 전형적인 이원론의 한 편에서 반대 항을 삭제하기보다, 평면성이라는 회화적 프레임 위에 선적 서사를 배제하는 행위 차제를 회화의 방법론으로 탐색하는 것에 가깝다. ‘내레이션 회화의 불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동시에 전형적인 조형질서가 누락하는 회화적 형상과 공간의 가능성을 평면 위에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여 그의 회화는 평면성의 제약을 따르면서도 고정되고 완결된 시나리오로부터 미끄러지는 회화적 형상의 다른 시간성을 확보한다.

평면 위에 펼쳐진 상들은 제각기 상이한 질료와 촉각적 시각성으로 현현하지만, 박경률의 캔버스가 전시되는 주변 공간에는 줄곧 사물들이 흩뿌려지듯 배치되곤 한다. 구체적인 윤곽보다원뿔과 구, 막대 등이 포개어지고 교차하는 형태는 캔버스 바깥 일군의 오브제가 어디까지나 회화적 연장으로서 사물임을 상기시킨다. 이른바 평면성의 확장은, 화면 밖 삼차원 공간에 펼쳐낸 이차원이라는 역설로, 반-이차원적 세계가 다시금 평면으로 회귀하는 순환성으로 이어진다. 이차원과 삼차원의 적대적인 항을 평면에 다시 옮긴 결과물은 삼차원을 모사한 소실점의 공간으로 회귀하지 않으면서 온전한 평면성으로도 다시 돌아가지 않는 이른바 ‘초과적 평면성’으로 산출된다. 명석하지만 분명하지 않은 형상의 순환을 유예상태의 회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각각의 작업들은 유예를 계열화하는 연작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원론적 대립항의 한쪽을 택하기보다 그 사이에서 유예를 변위하고 지속하는 작업은, 표층에 마찰하고 스며드는 물감의 질감과 붓의 강도를 달리하며 평면성의 심연을 변주해 나간다.


피부와 스크린, 자극과 얼룩의 각인
관습적 이미지를 탈구하는 유예상태의 회화는 서사를 누락하고 의미 연쇄의 단절된 틈새로부터 형상의 해체를 수행한다는 점에 김도연의 작업과 공명한다. 장지에 세필로 그린 작업은 수다하게 오간 건조한 필치 사이의 빈틈을 드러낸다. 완결적 의미를 배제하는 회화는 의미연쇄에 구멍을 내고 그 틈을 엮어 형상을 만든다. 선과 얼룩, 여백 위에 자라나는 소재들은 어디서 출몰했는지, 소재들 간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성긴 형상으로 가득한 화면은 특정 풍경보다는 풍경의 빈틈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낙서와 얼룩처럼 현현하는 영모(翎毛)와 인물, 사물과 초목의 단서는 쉽게 잡히지 않으며 직관적인 제목은 화면을 온전히 설명하지 않는다. 얇은 필치로 그려진 채 화면 위를 부유하는 형상들은 차라리 유령에 가까워 보인다. 형태는 있지만 개연성은 없으며 서로 간 직접적인 연결성 또한 보이지 않아 상황을 유추해내기 어려운 형상들은 어디서 출몰하여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주목할 점은 개별 형상의 의미를 추론하는 작업 근저에 이들이 현현하는 방식을 살피는데 있지 않을까. 가령 작가는 이미지가 각인되는 화면을 피부에 연동시켜 통감과 간지러움 등의 자극을 그리기의 강도(强度)로 연결한다. 돌발적인 자극에 반응하는 행위는 작가 스스로 ‘타투’라고 명명할 만큼 무언가 새기고 있다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피부에 남는 상처와 손상에 그리기의 행위를 떠올릴 때 회화는 각인이자 새김이 되고 행위의 잔여로 다시 쓰이는 것이다.

김도연에게 피부로서 회화는 내부 기관을 숨기고 외부에 반응하는 유기체의 기능을 소거한 감각적 이미지로 산출된다. 간지럽고 따가운 자극이 몸의 일관적 구조와 구심력을 방해하며 온전한 신체 지각을 흩트려 놓는 상황은, 조합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로 엮이지 않는 단편적 이미지로 채워진 화면을 남긴다. 표층의 자극이 화면을 경유하며 새긴 형상은 실체 모를 통각이 지닌 강도의 우의적 표상처럼 보인다. 또는 통각이 지워버린 서사의 단편을, 지워냄으로써 남겨진 직관적 심상을 떠올리게 한다. 자극에 반응하듯 출몰하는 이미지는 인지할 수 있지만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유령적 존재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 새롭게 제작된 폴리카보네이드판 작업들은 투명하고 얇은 물성을 취함으로써 각인 자체를 부각한다. 규칙 없이 잘린 화면에 새겨진 종교적 뉘앙스의 장면들은 한때 교회였던 전시공간의 성격에 착안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소재와 어떤 연결성을 보이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 앞뒤로 새겨진 형상은 시간에 따라 대기의 질감이 달라지는 전시공간에 빛의 투과를 달리 하며 풍경을 바꿔나간다. 창가에 매달린 작업들은 표층 자체만을 가지고 있는 물성을 강조하는데, 투명한 화면은 거꾸로 허공을 피륙 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차라리 감각의 구체적 형상이나 순수 시각성보다 순수 각인으로서 행위의 표상을 분리하고 각인의 표상으로서 소재들을 새겨 넣은 것은 아니었을까.


무력한 회화의 필사적인 수행
회화는 신체적 수행의 흔적이자 몸을 유비하거나 은유하는 표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면성과 회화적 이미지의 질서 아래 재편된다. 그것은 피부 표면에 각인을 남기고 각인 자체로 몸의 관습적 질서를 다시 쓰는 수행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낸다.

각인과 변칙적인 기억술의 관점은 최선 작가의 방법론을 곱씹도록 한다. 그는 폭력과 사건이 일어난 공간, 또는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들을 포착하지만 사건 자체의 증거를 추적하고 서사를 재구성하는 것과는 거리를 둔다. 어떤 효용성도 획득하는데 실패할 것임을 미리 유념하듯 장소를 방문하는 작가의 태도는 시대착오적 현장조사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장의 오물과 찌꺼기를 질료 삼아 화면에 옮겨 전시하는 공정은 사건과 장소의 내용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맥락을 미뤄둔다. 의도적으로 현장의 물성을 화면 위의 질료로 맞대어놓는 작업은 구체성으로부터 간격을 벌려냄으로써 공백의 자리에 해석적 확장을 도모한다.

작업은 심층의 원인을 굳이 추적하지 않으며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 하여 그의 그림은 작가의 말마따나 ‘딸꾹질’이거나, ‘손과 눈이 없는 화가’의 작업으로 설명된다. 다만 그의 태도는 현장의 무게를 회피하고 외면하기보다 그가 서 있는 장소로부터 무관하지 않음을 기억한다. 이는 작가로서 섣불리 세계를 재현하고 개입할 수 없지만, 이미 나에 앞서 엮여 있음을, 하여 부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재현적 윤리성을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 풍경보다 특정 장소의 소재를 취해 막연한 지표성을 활용하는 작업은, 적어도 이들이 뱉고 삼키는 행위와 교환을 통해 서로 간 종속되어 있는 생태계의 일부임을 감각적으로 환기시킨다. 누군가의 숨과 발자국이, 또는 그의 다른 흔적이 관객에게 개입하고 있다는 표현은 그저 문학적 레토릭으로만 그치지 않는 셈이다.

내레이션 의존성을 배제하는 작업의 바탕에는 우연적 속성들이 채워진다. 그것은 지워진 사실들, 이미 사후적이며 불확실할 수밖에 없음 자체를 남기는 시도처럼 보인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채우는 먼지와 얼룩, 말라버린 오물과 냄새가 증언하는 현장의 재현 불가능성과 동시에 절박한 재현의 의지는, 여신 레토(Leto)의 저주를 받아 돌이 되어서도 눈물을 흘리는 니오베(Niobe)처럼 사건의 추적과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없는 무의미하고 사후적인 눈물을, 왜상적 표상을 향한다. 그것은 2005년 영상 <극점>처럼 작가가 개입할 수 있는 범위가 얼어붙은 호수에 입김을 부는 행동부터 이번 전시에 마르지 않는 질료를 고안하여 끝없이 안료를 쏟아내는 마르지 않는 그림으로, 못을 찍어낸 자국을 꼴라주한 화면을 바닥에서 띄워냄으로써 중력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닥에 가장 밀착해 있는 작업으로 지속한다. 실재의 무력한 지표로서 얼룩을 끝없이 남기는 작업은 공백의 무게를 남기면서 전시장 위로 현장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낡은 출구로서 회화
마르지 않는 그림, 얼룩으로 남는 그림의 반대편에는 사후적으로 의미 부여되는 그림, 감가상각에 자유롭지 않은 그림, 손상을 피할 수 없으며 손상을 부정하지 않는 그림을 숙고하는 이우성 작가의 걸개가 있다. 소소한 일상을 남기는 그림은 그가 속한 집단과 지역에 친밀한 시선을 두는 동시에 재현적 거리를 확보한다. 화면들은 독자적인 성격을 갖는 동시에 화면과 화면 사이 연결고리를 만드는가 하면, 화면과 주변 환경 사이 공간에 다른 서사 가능성을 열어냄으로써 상호 개입의 성격을 갖는다. 제 주관적 망상을 여과시켜 패턴이 되고 단조로워진 풍경은 점잖게 묘사되지만 결국 물음표를 남긴다. 이른바 그림은 세상에 발을 딛고 리듬을 맞추면서도 불협화음을 내는 기록이자 그 실천인 것이다.

<접혔다 펼쳐지는 그림> 연작으로 묶이는 이우성의 걸개는 줄곧 이동성과 휴대성에 초점이 맞춰지거나 무력한 세대의 불가피한 선택 정도로 독해되곤 했다. 하지만 수년 간 작가의 작업을 지켜보면서 새삼 드는 물음은 보관상 취약함이었다. 이번 전시에 과거의 작품들을 골라 전시한 선택 역시 또 하나의 수행적 회화의 연장선 위에 있지 않았을까. 과거의 작업을 선별 전시하는 기술은, 회화의 수행성에 제작과 전시 이후 낡고 쇠락해가는 시간성에 저항하고 동시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부정성의 프로세스를 포함한다.

걸개는 특성상 여느 캔버스 회화보다 훼손의 정도가 심하다. 전시된 작업 또한 물감 면이 벗겨지고 갈라져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일차적으로 스냅 샷 같은 화면구성 속에서도 비현실적 장면, 또는 다른 세계로 연결된 통로를 연상시키는 구멍들을 화면에 그린 걸개작업들을 선별했다는 인상을 주는데, 다른 세계로 연결된 통로와 끈들의 소재는 낡아가는 화면과 상충하며 오래된 미래, ‘낡은 출구’라는 회화의 또 다른 역설을 제시한다. 동시에 천장에 매달려 후면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걸개는 소재들로 가득한 화면과 대비를 이루며 슬쩍 배인 물감면의 출구처럼 기능한다.

톤 다운된 이미지는 풍경의 패턴들로 점잖게 떠오른다. 때로 이우성의 그림은 정념의 빈자리가 헛헛하게 남은 대기를 품는다. 우의적인 소재들이 끝없이 위치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기억의 여분이자 흔적을 가공한 결과임을 환기한다. 일상의 풍경을 조금씩 변형시킨 화면은 친밀함과 재현적 거리 사이를 평행선처럼 유지하며 다소 간 긴장을 남기지만, 예의 긴장은 개개의 요소를 응집시키는 구력으로 작동한다. 낡아가는 와중에도 그림은 친밀한 시선을 기다린다. 그렇게 세계와 화가 사이, 화면과 관객/세계 사이 이상한 ‘밀당’을 수행하는 회화는 다소 진부한 일상의 풍경이 남기는 여운을 남기며 인물과 인물, 사물, 세계와 제 관계를 그린다. 그가 화면에 남긴 다른 세계를 향한 통로는 낡아가고 있지만, 그림은 물감의 균열과 얼룩으로부터 다가오는 또 다른 시간을 품어낸다.


회화의 재귀적 비전
명성교회 간판을 달고 ‘This is not a church’로 읽지만, 비공식적으로 ‘명성교회’로 회자되는 전시 공간은 과거 주택가에 위치한 교회 예배당의 전형을 따른다. 전시는 기둥 없이 트인 예배당의 공간적 흔적들을 고려하면서 작품을 배치한다. 창가에는 김도연의 폴리카보네이드 작업들이 빛을 받으며 허공에 나부끼고, 기단에는 이우성의 걸개가 맞은편 최선의 <부작회화>를 마주하며 역시 매달려 있다. 걸개들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다른 세계로 연결하는 통로의 이미지를 반짝이며 물감 밴 뒷면을 노출하고 있다면, <부작회화>는 전시된 시간을 증언하기라도 하듯 바닥에 흥건히 안료를 뱉어낸다. 창가에 매달린 투명한 폴리카보네이드판이 화면을 투사하는 빛의 망상을 긁어낸 것처럼 투명하게 공간에 흔들리고 있다면, 전시장 복판에는 화면 가득 못에 눌린 자국을 머금은 채 땅 위에 떠 있는 듯 배치된 최선의 또 다른 <부작회화>가 이에 상응한다. 무엇 하나 고정되는 것 없이 의미를 잃고 잃어감으로써 빈자리의 가능성을 찾는 회화적 수행이 공간을 재정의하는 동안 교회 벽에 배치된 박경률의 그림은 작가의 몸짓과 강도를 달리하며 평면의 심연을 변주한다.

각각의 회화는 제가 속한 질서에 예속된 채 제작된다. 물리적·매체적 조건으로부터 온전히 탈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업은, 동시에 회화의 질서를 온전히 이행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음을 입증한다. 이중의 실패와 미끄러짐은 외려 회화의 조건으로부터 회화 바깥의 속성들을 개입시키며 상이한 회화적 방법론을 모아낸다. 이들은 재귀적 문법으로 회화를 재차 명명하며 끝없이 평면성의 외연을 향하고 그 질서를 해체하지만, 재차 평면의 프레임으로 예속되는 외밀한 (탈)평면의 화면을 전개한다. 실패와 유예의 감각을 회화적 방법론으로 갱신해나가는 시도들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닌 장소에 임하(지 않)는 비전의 흔적으로, 온전히 임재하지 않은 채 평면을 초과하는 평면성의 비전에 닿아 있지는 않을까. 하여 수행하는 회화란, 불가능함을 끝없이 시각화하는 유예의 평면성의 심연을 계속해서 갱신해내는 비완결성의 질서를 전개하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