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Kim Doyeon

더미의 시간*




“ 글을 먼저 읽으신 후에
두 번째
목판으로 이동해주시길 바랍니다. ”




비온 뒤의 흐린 하늘, 황토색 강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 강가에는 키 작은 잡풀이 무성하다. 떠돌이 개 한 마리가 부드러운 흙더미를 헤집는다. 개의 목에는 몸보다 기다란 목줄이 묶여 있다. 붉은 흙 사이로 희고 단단한 물체가 드러난다. 뼈들이 갓 태어난 듯 빛을 뿜어내고 있다. 잠시 강물이 흐르기를 멈춘다. 뼈들은 말한다.

나는 부드러운 흙 속에 죽어 누워 있다.
강물이 휘어지는 곳 두터운 퇴적층 속에.
살은 이미 오래 전에 썩어 흩어졌고 뼈도 온전히 남아있지 않다.

긴 시간이 흘러 내 영혼이 나를 깨웠다.
내 안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죽은 몸은 썩지 않는 단 하나의 살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른 몸을 부르기 위한 것이다.

나는 마지막 살점 하나를 흘러가는 시간 속에 꺼내놓았다.
그러자 살점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병조림에 티스푼을 꽂아 넣는 순간 발생하는 작은 손상 같은,
작은 부패였다.

맨 처음에는 땅 속의 벌레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들었다.
새들이 벌레를 잡아먹고 똥을 누자
작은 들짐승들이 모여들었다.
들짐승들은 기다란 발톱으로 내 몸 위에 덮인 흙더미를 파헤쳐
텅 빈 눈구멍에 빛을 쬐어주었다.

그때 멀리서
오랫동안 한 곳에 묶여 있어
생겨나고 사라지고 흘러가는 모든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된 개 한 마리가
나의 냄새를 맡았다.
개는 냄새에 이끌려 앞을 향해 몇 걸음 걸었고
그제야 자기 목에 걸린 목줄이 끊어져 있음을 알았다.
나는 흙 속에서 개를 기다렸다.
마침내 도착한 개가 축축하고 뜨거운 주둥이로 내 몸을 헤집었을 때
나는 깨어났다.

흘러가는 모든 것들이 동작을 멈추고
방학의 교실 같은 침묵이 세상을 가득 메웠다.
배꼽이 있던 자리에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소용돌이는 투명한 불꽃처럼 일렁이며 모든 풍경을 구부러뜨렸고
모든 돌들을 중력으로부터 구해냈다.
그 안에서는 무엇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무엇도 무엇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놓지 않았다.

이때 만일 누군가, 흐르기를 멈춘 세상에서 혼자만 흐를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있어
소용돌이를 들여다보았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만든 세상에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이 생겨났구나.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균형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 바
좀먹은 커튼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에 불과할 터
세상의 한 귀퉁이에 그대로 내버려 두겠노라.

소용돌이는 회전운동을 멈추더니 하나의 투명한 면이 되었고
스스로 몸을 접었다 펼치며 최초의 숨을 쉬었다.
그러자 하나이지만 두 개인 면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내 영혼의 모양인 것 같았다.
영혼은 몸으로부터 웃자란 뼈처럼 보였다.
곧고 투명한 뼈.
신의 손을 타지 않은 것들은 점차 투명해진다.

뼈들은 달그락거리며 제 자리를 찾아가고 점점 사람의 모양이 되어간다.


맨 처음 느낀 건 신맛이었다.
부패한 살의 맛.
그것은 점차 갓 태어난 포유류의 젖비린내로 변해갔다.
눈구멍에 둥근 빛이 차고 입구멍에 연한 살덩이가 생겨났으며
흙을 헤집을 수 있는 손가락이
언제든 항복할 수 있는 이마와 무릎과 등가죽이 생겨났다.
나는 나의 죽은 몸을 양분 삼아 다시 태어났고
나의 젖을 빨며 다시 자라났다.
그리고 마침내 중력을 가지게 되었다.

바닥에 누워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켜 앉는다.

무거운 것은 아래에 가벼운 것은 위에 놓이고
흙과 돌이 흘러내리며
산과 동산 언덕과 구릉 크고 작은 더미들이 만들어진다.
이번 생에 나는 더미라고 불릴 것이다.

그는 말하는 동안 점점 젊어져 어린 아이의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일어서서 자신이 누워있던 흙을 바라본다.
암전.

김연재


* 이 텍스트는 지난 2024년 8월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 <없는 시간> (희곡 제목 : <더미와 교육>)을 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