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Kim Doyeon

모든 탑이 다시 쌓일 때





“ 글을 먼저 읽으신 후에 첫 번째 목판으로 이동해주시길 바랍니다. ” 




이 장에서는 아주 현실적인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반복해 상상하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어느날 애인이 죽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부화한다. 그때 나는 내가 사랑에 빠졌음을 알게 된다. 상상 속에서 나는 응급실에 뛰어가고 장례식에서 눈물을 훔치고 묘지를 서성이고 앰뷸런스에 실려가고 바닷가 외딴집에 앉아 잠자코 죽음을 지킨다. 나는 그의 보호자이자 집행자이며 호위무사다. 막중한 책임을 진 채 그의 아픔과 슬픔과 두려움을 감당한다. 얇은 머리칼과 힘 없이 뻗은 팔다리, 창백한 뺨, 기운 없는 성기는 모두 나의 것이다. 나는 그의 어디든 만질 수 있고 그에 관한 모든 것을 허락 없이 결정할 수 있고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그는 나를 용서한다. 죽음 앞에서 그는 계속해서 태어나고 새롭게 아름다워진다. 나는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다.

어느 오후에 늙은 애인이 잠든 모습을 보았다. 그는 오래된 파피루스처럼 말라 있었다. 눈밑은 세월에 마모되어 반질반질해 보였다. 그때 나는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고린도전서의 이 유명한 구절은 주로 사랑은 온유하며 부터 인용된다. 그러나 그 앞에 묵음처럼 숨겨진 말 하나가 있다. 나는 침묵 속에서 묵음을 발음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그것은 잠수를 위한 들숨처럼 팽팽하게 정지한 채 파열될 소리를 인내하고 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본다. 죽음처럼 잠잠한 그의 얼굴. 잠든 얼굴 위로 억겁의 세월이 구름 그림자처럼 지나간다. 멸종한 새들이 푸드덕대며 떼지어 날아가고 발 아래 돌들이 구른다. 대륙들이 엉겨붙고 고생대의 식물들이 무성해지고 오래 전 사막을 뒤덮었던 밤하늘이 안구처럼 떠오른다. 나는 기도한다. 무엇을? 소원을 비는 것만이 기도는 아니다. 견딜 수 없는 아름다움을 머나먼 우주 어딘가로 전송하는 것, 이것이 나의 기도다. 빛이 변한다. 나는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나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 입천장이 말라간다는 사실이 슬프다. 나는 그의 이마가 슬프다. 나는 그의 살갗이 조금씩 바스라진다는 사실이 슬프고 그가 사는 동안 보게 될 모든 이파리와 모든 빗방울이 낱낱이 슬프고 그가 저 위험한 문지방과 모서리와 과속방지턱과 비보호 좌회전 어쩌고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나는 잠시 그가 죽었을까봐 두려워진다. 내가 그 대신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을까봐 아연해진다. 그를 깨워 다시 돌기 시작하는 혈액을 확인하고 그의 긴 날숨 속에서 안도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나는 오래 참는다. 오직 그 자신의 충분함만이 그를 깨울 수 있도록 모래알 하나마저 단속한다. 연약해진 마음을 쏟아놓거나 희열에 들뜬 마음을 비벼대지 않기 위해, 그가 잠을 자는 동안 세상이 이사가지 않았음을 알려주기 위해.



김연재